
제1부 제국의 여명 (1921-1966)
제1장 울산에서 온 소년
롯데그룹의 창업주 신격호의 삶은 20세기 한국의 격동적인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그의 원대한 야망과 불굴의 의지는 그가 태어난 시대적, 환경적 배경에서부터 싹텄다. 1921년 11월 3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의 평범한 농가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유년기는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맏이로서 어린 나이부터 가족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져야 했던 환경은 그의 성실함과 강인한 생활력의 밑거름이 되었다.
울산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그는 잠시 목장에서 일했으나, 더 큰 배움과 성공에 대한 갈망은 그를 고향에 묶어두지 않았다. 1941년(혹은 1942년), 스무 살의 청년 신격호는 단돈 83엔을 손에 쥐고 일본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는 공식적인 도일이 아닌 밀항에 가까운 형태였으며, 이는 성공을 향한 그의 절박함과 대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도쿄에서의 삶은 고학생의 전형이었다. 낮에는 우유와 신문을 배달하는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밤에는 와세다대학 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 이공학부) 야간부에서 화학을 공부하며 주경야독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그의 정체성은 훗날 그가 세운 거대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일본에서의 생존과 성공을 위해 '시게미쓰 다케오(重光 武雄)'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히 편의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이는 그의 인생과 사업이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는 첫걸음이었다. 바다를 건넌 이 행위 자체가 그의 커리어 전반을 규정하는 '이중성'의 시작점이었다. 일본의 자본, 기술, 경영 기법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 이 이중성은 훗날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지만, 수십 년 후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롯데의 국적은 어디인가'라는 논란을 촉발하며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게 된다.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그의 별명은 바로 이 근원적인 이중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그의 청년 시절 꿈이 작가였다는 사실은 그의 경영 스타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는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그의 사업적 천재성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문학적 감수성은 훗날 그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영감을 받아 회사명을 '롯데(Lotte)'로 정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그가 단순히 화학 공식과 생산 원가에만 매몰된 기술자가 아니라, 브랜드, 감성, 서사를 통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전략가였음을 시사한다. 롯데가 초창기부터 '입속의 연인'과 같은 혁신적인 광고 문구로 시장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제품이 아닌 '경험'과 '이야기'를 판매하려는 그의 문학적 상상력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제2장 이국에서 일군 이름
패전 후 혼란스러운 일본에서 신격호의 기업가로서의 첫걸음은 쓰라린 실패로 시작되었다. 그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한 일본인 사업가 하나미쓰로부터 5만 엔이라는 거금을 빌려 1944년 선반용 기름(커팅오일) 공장을 세웠으나, 공장을 가동하기도 전에 연합군의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그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신의 화학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기, 그는 비누, 포마드, 화장품과 같은 기초 생필품에 대한 수요가 폭발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불과 1년 반 만에 하나미쓰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이자로 집 한 채를 사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을 통해 그는 사업의 묘미를 터득하고, 화학 회사로 성장할 수도 있었던 기로에 섰다.
진정한 전환점은 껌 사업에서 찾아왔다. 당시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씹던 껌은 일본 어린이와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전공인 화학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껌을 사들여 성분을 분석하고 장단점을 파악하는 등 철저한 연구개발에 몰두했다. 그는 기존 제품들의 장점만을 모아 품질이 월등히 뛰어난 새로운 껌을 개발했고, 이는 시장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얻었다. 과자점 주인들이 그의 연구소 앞에 새벽부터 줄을 서서 물건을 받아 가려 할 정도였다.
이 폭발적인 수요에 힘입어 그는 1948년 6월, 자본금 100만 엔과 직원 10명으로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기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1950년에는 재일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신주쿠구 신오쿠보에 새로운 껌 공장을 설립하며 생산 능력을 확장했다. 이 공장 설립은 단순한 사업 확장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곳을 중심으로 일자리를 찾아 재일 한국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는 오늘날 도쿄 최대의 코리아타운이 형성되는 경제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신격호의 사업적 결정이 도쿄라는 도시의 사회지리학적 지형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의 성공은 단순한 운이 아니었다. 이는 철저한 기술적 연구개발과 예리한 시장 분석 능력의 결합체였다. 그는 미국 껌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학자로서의 전문성을 발휘해 제품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더 나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냈다. 이때 확립된 '품질본위(品質本位)' 정신은 그의 평생 경영철학의 근간이 되었다. 1961년, 롯데는 천연 치클을 사용하는 고급화 전략을 통해 당시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하리스(Harris)'를 제치고 일본 껌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껌 사업의 성공을 발판으로 그는 초콜릿, 비스킷, 아이스크림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일본 굴지의 종합 제과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제2부 고국으로의 귀환과 비상 (1967-1980년대)
제3장 조국의 부름, 기업보국(企業報國)
1960년대 중반,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확고히 자리 잡은 신격호의 시선은 바다 건너 고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모국 투자는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다. 1965년 체결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즉 한일기본조약은 양국 간의 경제 교류의 물꼬를 텄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며 국가 발전에 필요한 외자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었고, 일본에서 성공한 재일교포 기업가들은 가장 매력적인 투자 파트너였다.
신격호는 일본에 거주하면서도 끝까지 한국 국적을 유지할 만큼 조국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는 '기업을 통해 국가에 보탬이 된다'는 '기업보국(企業報國)'을 자신의 경영 이념으로 삼았다. 이러한 그의 신념과 박정희 정부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면서 롯데의 한국 진출은 급물살을 탔다. 1967년, 그는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하며 공식적으로 모국 투자를 시작했다.
그의 기업보국 철학은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1960~70년대 한국의 국가 주도 경제 체제에 진입하기 위한 매우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었으며, 외국에 기반을 둔 기업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신격호는 롯데의 기업 목표를 근대화와 수출 주도 성장이라는 국가적 의제와 일치시킴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정부는 외자 유치 실적을 위해 롯데에 법인세 감면 등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제공했고 , 롯데는 이를 통해 한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이는 박정희 정부에게는 자본과 선진 경영 기법을, 신격호에게는 정치적 비호와 사업 확장의 기회를 제공한 완벽한 공생 관계였다. 그의 애국심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고도성장기 한국에서 사업을 펼치기 위한 핵심적인 '입장권'이었던 셈이다.
제4장 위기 그리고 기회, 호텔을 지으라는 명령
롯데가 한국에서 제과업을 넘어 거대 재벌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예기치 않은 위기에서 찾아왔다. 1970년, 롯데껌에서 쇳가루가 검출되었다는 이른바 '쇳가루 사건'이 터졌다. 서울시는 즉각 롯데제과에 3개월의 제조정지 처분을 내렸고, 이는 신생 기업이었던 한국 롯데의 존립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바로 이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그는 일본에 머물고 있던 신격호를 청와대로 긴급히 호출했다. 훗날 신격호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규제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가로 한국의 관광 산업 발전을 위해 서울 중심부에 세계적 수준의 호텔을 지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실상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앞에서 신격호는 "예, 알겠습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쇳가루 사건은 단순한 식품 위생 문제를 넘어, 당시 개발독재 국가가 민간 자본을 국가적 프로젝트에 동원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는 롯데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일대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한국 롯데는 일본처럼 제과 사업에 집중하는 대형 식품 회사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명령'은 롯데를 핵심 역량과는 전혀 다른, 자본 집약적인 관광 및 호텔 산업으로 강제로 이끌었다. 정부는 약속대로 롯데의 호텔 건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서울의 심장부인 소공동에 위치한 반도호텔과 국립중앙도서관 부지를 롯데가 인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고 , 이를 통해 1979년, 롯데그룹의 새로운 상징이 된 호텔롯데가 탄생할 수 있었다. 위기는 그렇게 거대한 기회로 탈바꿈했다. 이 정치적으로 설계된 사업 다각화는 롯데가 유통, 관광, 레저를 아우르는 오늘날의 복합 그룹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제5장 한국 롯데의 기둥을 세우다
호텔롯데의 성공적인 개관은 한국 롯데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끄는 기폭제가 되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신격호는 정부의 비호 아래 공격적인 사업 확장과 다각화를 추진하며 한국 롯데 제국의 핵심 기둥들을 하나씩 세워나갔다.
유통 부문: 1979년 11월, 호텔롯데와 함께 문을 연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는 한국 유통업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와 현대적인 시설, 선진적인 상품 구성을 선보인 롯데쇼핑센터는 개점 당일 30만 명의 인파가 몰릴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 단숨에 업계 1위로 올라서며 이후 4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켰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백화점의 등장이 아니라, 한국 소비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관광·레저 부문: 소공동에서의 성공 모델은 잠실에서 더욱 거대한 규모로 재현되었다. 신격호는 허허벌판이었던 잠실에 호텔, 백화점, 그리고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테마파크를 결합한 복합단지 '롯데월드' 건설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추진했다. 내부의 회의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신은 확고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롯데호텔 월드와 롯데백화점 잠실점이 차례로 문을 열었으며, 이듬해 롯데월드 어드벤처가 개장하며 잠실은 서울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석유화학 부문: 1979년, 롯데는 국가 기간산업 진출이라는 중대한 전략적 결정을 내린다. 바로 정부 소유였던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한 것이다. 이는 롯데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에 무게감을 더한 결정적인 한 수였으며, 훗날 그룹의 핵심 수익원으로 성장한 롯데케미칼의 모태가 되었다.
건설 및 기타 부문: 이 거대한 프로젝트들을 실현하기 위한 실행 도구도 확보했다. 1978년 평화건업사를 인수하여 '롯데건설'로 사명을 변경하고 그룹의 인하우스 건설사로 삼았다. 이 외에도 롯데리아(1979년), 롯데칠성음료(1978년), 프로야구단 롯데 자이언츠(1982년) 등을 잇달아 설립하거나 인수하며 소비자의 일상 곳곳에 파고드는 거대 소비재 제국을 완성했다.
롯데의 한국 내 다각화 전략은 '시너지 클러스터' 모델로 요약할 수 있다. 호텔, 백화점, 테마파크, 시네마 등은 개별 사업체가 아니라, 특정 공간(소공동, 잠실)을 중심으로 소비자의 시간과 돈을 완전히 점유하도록 설계된 유기적인 생태계였다. 롯데건설이 인프라를 구축하고, 롯데쇼핑이 상품을 채우며, 호텔롯데와 롯데월드가 경험을 제공하고, 대홍기획이 이를 홍보하는 완벽한 수직·수평적 통합 모델이었다. 이 부동산 기반의 복합 소비자 경험을 창출하는 전략은 한국 시장에서 롯데만의 독보적인 경쟁 우위가 되었다.
제3부 거인의 철학과 역설
제6장 거화취실(去華就實)의 복음
신격호의 경영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철학은 '거화취실(去華就實)'이라는 네 글자로 압축된다. 이는 '화려함을 멀리하고 내실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그의 집무실에 평생 걸려 있던 좌우명이자 롯데그룹의 조직 문화에 깊이 각인된 원칙이었다. 이 철학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경영 원칙으로 발현되었다.
품질본위(品質本位): 그는 "좋은 제품은 스스로 팔린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1962년 가나초콜릿을 개발할 당시 "원가가 비싸져도 좋으니 제품이 아닌 예술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던 일화는 그의 품질에 대한 집착을 잘 보여준다. 이는 일본에서 껌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이어진 원칙으로, 롯데 성공의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었다.
현장경영(現場經營): "모든 문제의 해답은 현장에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불시에 공장이나 백화점 매장을 방문해 제품의 진열 상태, 위생, 안전 설비 등을 꼼꼼히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롯데호텔 준공 후 복도 천장을 직접 뜯어내 단열과 방음 상태를 확인했다는 일화는 그의 완벽주의와 현장 중심주의를 상징한다.
재무적 보수주의: 그는 빚을 내어 사업을 확장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기업에 있어서 차입금은 우리 몸의 열과 같다. 과다한 차입금은 만병의 근원"이라는 그의 말은 롯데의 무차입 경영 원칙을 대변한다. 이러한 보수적인 재무 전략 덕분에 롯데는 1997년 외환위기와 같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다른 재벌 그룹들에 비해 훨씬 안정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역량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핵심역량 집중: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빚을 내어 방만하게 사업을 벌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죄를 짓는 일"이라며 무분별한 사업 확장을 비판했다. 신규 사업은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를 창출하고 핵심 역량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이러한 그의 경영 철학은 본질적으로 전쟁과 가난을 겪은 전후 세대 창업가의 생존 전략이었다. 금융 기법이나 화려한 외형보다는 현금 흐름과 실질적인 품질이라는 기본에 충실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이는 '성장 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정부 융자에 의존해 공격적으로 몸집을 불렸던 동시대의 많은 한국 재벌 총수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이다. 이 철학은 롯데를 위기에 강한 강건한 기업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훗날 변화에 더디고 보수적인 기업 문화를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제7장 황제의 통치
신격호의 리더십 스타일은 한마디로 '황제 경영'으로 요약된다. 그는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과 일본에 걸친 거대 제국을 단 한 사람의 의지로 움직였다. 그룹의 모든 주요 의사결정은 오직 그를 통해서만 이루어졌고,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가 1만 5천여 종에 달하는 자사 제품의 생산가와 소비자가를 모두 외우고 있었다는 일화는 그의 철저한 장악력과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챙기는 통치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러한 강력한 카리스마와 중앙집권적 리더십은 그룹의 초창기 성장 과정에서 신속한 의사결정과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는 점차 그룹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다. 그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에서는 전문 경영인 그룹이 성장하기 어려웠고, 모든 권한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경직된 상명하복식 문화가 고착화되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후계 구도를 명확히 정립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장남 신동주에게는 일본 롯데를, 차남 신동빈에게는 한국 롯데를 맡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공식적으로 후계자를 지명하거나 권력을 이양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 오히려 두 아들을 미묘하게 경쟁시키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는 절대 권력자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기 위해 후계자들 간의 견제와 균형을 유도하는 전제군주적 통치 방식과 유사했다.
결국 이 '황제 경영'은 훗날 벌어질 비극적인 경영권 분쟁의 씨앗을 뿌린 셈이다. 명확한 승계 원칙 없이 오직 '황제'의 의중에만 의존하던 시스템은 그가 노쇠하여 판단력이 흐려지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 구축한 제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의 통치 스타일 때문에 가장 큰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는 군주를 위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왕조를 이어갈 계승의 법칙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제8장 야망의 정점, 왕관의 보석
신격호의 야망과 유산을 가장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건축물은 단연 롯데월드타워다. 이 프로젝트는 1987년에 처음 구상된 그의 일생일대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는 "언제까지 외국 관광객들에게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세계 최고의 그 무엇이 있어야 외국 사람들이 즐기러 올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며, 한국을 대표할 새로운 랜드마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 꿈을 실현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인근 서울공항의 비행 안전 문제로 인해 정부의 건축 허가를 받는 데에만 20년 이상이 소요되었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계획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4조 2천억 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사업비와 계속되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신격호는 결코 이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이명박 정부 시절 최종 허가를 받아 2010년 착공에 들어갔고, 7년의 대공사 끝에 2017년, 지상 123층, 높이 555m의 초고층 빌딩이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정의하며 그 위용을 드러냈다.
롯데월드타워는 그의 경영 철학에 존재하던 핵심적인 역설을 풀어내는 열쇠다. 평생 '거화취실(화려함을 멀리함)'을 외쳤던 그가 이토록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에 집착한 것은 언뜻 모순처럼 보인다. 투자금 회수에 대한 질문에 "회수 불가"라고 잘라 말했을 정도로, 그는 이 프로젝트를 단순한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롯데월드타워는 개인의 과시욕을 채우기 위한 '화(華)'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파리의 에펠탑처럼 수백 년간 서울 시민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상징물을 조국에 바치는, 그의 '기업보국' 철학의 최종적인 실현이었다. 즉, 롯데월드타워는 국가를 위한 '실(實)'이었던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검소하고 소박했지만, 국가의 격을 높이는 일에는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었던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이 거대한 타워는 그의 인생을 지배했던 두 가지 핵심 철학, '거화취실'과 '기업보국'이 마침내 하나로 합쳐진 야망의 결정체였다.
제4부 제국의 위기 (2015-2020)
제9장 왕자의 난
2015년, 신격호가 고령으로 쇠약해지자 그가 평생 억눌러왔던 후계 갈등이 마침내 수면 위로 폭발했다. 이는 한국 재계 역사상 가장 추하고 파괴적인 경영권 분쟁, 이른바 '롯데판 왕자의 난'의 시작이었다.
분쟁의 서막은 2015년 초, 장남 신동주가 일본 롯데홀딩스를 포함한 모든 계열사 이사직에서 해임되면서 열렸다. 이에 앙심을 품은 신동주는 그해 7월 27일, 고령의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을 앞세워 일본으로 건너가 차남 신동빈 회장을 포함한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진 6명을 전격 해임하는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러나 신동빈 회장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그는 다음 날 긴급 이사회를 소집해 아버지 신격호를 롯데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해임하고 명예회장으로 추대하며 경영권을 방어했다.
이후 양측의 싸움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신동주 측은 "아버지가 차남에게 격노해 직접 일본으로 간 것"이라며 신격호의 의지를 대변한다고 주장했고 , 신동빈 측은 고령인 총괄회장의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맞섰다. 양측은 소송전, 여론전, 주주총회 표 대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서로를 공격했다. 신동주는 아버지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내용의 '지시서'를 공개했고, 신동빈은 그룹의 안정적인 경영과 미래 비전을 내세우며 주주들을 설득했다.
결과는 신동빈의 완승이었다. 한일 롯데그룹의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일본 롯데홀딩스의 주주 구성이 승패를 갈랐다. 신동빈 회장은 핵심 의결권을 쥔 종업원지주회와 임원지주회의 확고한 지지를 바탕으로 매번 주주총회에서 신동주 측의 경영진 해임 및 이사 선임 안건을 모두 부결시켰다. 결국 2017년 6월, 신격호 총괄회장마저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 70년간 이어져 온 그의 시대는 아들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표 1: 롯데 경영권 분쟁 주요 일지 (2014-2017)
| 시기 | 주요 사건 | 내용 |
| 2014년 12월 | 신동주 해임 | 신동주, 일본 롯데 부회장 등 주요 보직에서 전격 해임 |
| 2015년 7월 27일 | '도쿄 쿠데타' 시도 | 신동주, 아버지 신격호를 대동하고 일본으로 가 신동빈 등 이사 6명 해임 시도 |
| 2015년 7월 28일 | 신동빈의 반격 | 신동빈, 긴급 이사회 소집. 아버지 신격호를 롯데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에서 해임하고 명예회장으로 추대 |
| 2015년 8월 | 주주총회 1차전 | 일본 롯데홀딩스 임시주총, 신동빈 체제 지지하며 신동주 측 제안 부결 |
| 2015년 10월 | 광윤사 장악 | 신동주, 광윤사 주총을 통해 대표이사로 취임하며 반격의 발판 마련 |
| 2016년 3월 | 주주총회 2차전 | 일본 롯데홀딩스 임시주총, 신동주 측의 신동빈 이사 해임안 등 부결 |
| 2016년 6월 | 주주총회 3차전 | 일본 롯데홀딩스 정기주총, 신동주 측 주주제안 또다시 부결 |
| 2017년 6월 24일 | 신격호 시대의 종언 | 일본 롯데홀딩스 정기주총, 신격호 명예회장을 이사직에서 재선임하지 않기로 결정. 창업주, 경영에서 완전 배제 |
제10장 미궁 속의 지배구조
'왕자의 난'은 롯데그룹이 수십 년간 감춰왔던 기이하고 불투명한 지배구조의 민낯을 대중 앞에 드러냈다. 싸움의 과정에서 한국 재계 5위의 거대 기업이 실제로는 소수의 비상장 일본 회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적 충격과 분노를 샀다.
롯데그룹의 지배구조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정점에는 신격호 일가가 지배하는 일본의 포장재 회사 '광윤사(光潤社)'가 있었다. 이 작은 회사가 일본 '롯데홀딩스'의 최대주주였고, 롯데홀딩스는 다시 한국 '호텔롯데'의 최대주주였다. 그리고 호텔롯데는 롯데쇼핑, 롯데건설 등 대부분의 한국 핵심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사실상의 지주회사 역할을 했다.
이러한 구조는 신격호가 최소한의 지분으로 양국에 걸친 거대 제국에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설계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이 복잡한 구조는 후계 다툼의 주된 전장이 되었고, "롯데는 일본 기업인가, 한국 기업인가"라는 국적 논란에 불을 지폈다.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신동주, 신동빈 형제가 유창한 일본어로 서로를 비방하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면서 이러한 논란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이는 그룹 이미지에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혔다.
표 2: 롯데그룹 지배구조 간소화 비교
| 구분 | 지주사 체제 전환 이전 (2015년) | 지주사 체제 전환 이후 (현재) |
| 지배구조 | 일본 광윤사 → 일본 롯데홀딩스 → 호텔롯데 → 다수의 한국 계열사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 | 일본 광윤사 → 일본 롯데홀딩스 → 호텔롯데 ↓ 롯데지주(주) → 다수의 한국 계열사 (수직적 출자 구조) |
| 핵심 | 호텔롯데가 사실상 한국 롯데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며, 일본 롯데홀딩스가 이를 지배 |
롯데지주가 한국 계열사 대부분을 지배하는 공식 지주회사로 출범. 순환출자 해소 |
| 과제 | 불투명하고 복잡한 순환출자 고리. 일본 기업의 한국 기업 지배 논란. | 호텔롯데가 여전히 롯데지주의 주요 주주로 남아있어, 일본 롯데홀딩스의 영향력이 잔존. '미완의 개혁' |
제11장 길고 고통스러운 황혼
경영권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창업주 신격호의 마지막은 비극적이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군 제국에서 아들에 의해 쫓겨난 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급격히 쇠약해졌다. 한때 '황제'로 군림했던 그는 법정에 서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는 경영권 분쟁과는 별개로, 롯데그룹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2016년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기소되었다.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와 장녀 신영자 씨에게 롯데시네마 매점 운영권을 몰아주거나, 이들에게 허위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회사에 수천억 원대의 손해를 끼친 혐의였다.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출석한 그는 "롯데는 내 회사인데 누가 나를 기소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법원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 가족들은 그의 정신 건강 문제를 이유로 법원에 성년후견 개시를 신청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한정후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이는 그의 법적 행위 능력이 제한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때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던 절대 권력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었다.
자식들의 골육상쟁을 지켜보며 법정과 병원을 오가던 그는 끝내 화해하지 못한 두 아들을 남겨둔 채 2020년 1월 19일, 98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그의 마지막은 '황제 경영'이 맞이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결말을 보여주는 강력한 경고이자, 후계 준비에 실패한 창업주가 겪게 되는 개인적 비극의 전형이었다. 그를 절대 권력자로 만들었던 바로 그 시스템이 결국 그 자신을 삼켜버린 것이다.
제5부 창업주를 넘어, 롯데의 미래
제12장 '뉴롯데' 개혁
경영권 분쟁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고 마침내 그룹의 '원톱'으로 올라선 신동빈 회장은 2017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뉴롯데(New Lotte)' 비전을 선포하며 대대적인 개혁의 깃발을 올렸다. 이는 추락한 그룹 이미지를 쇄신하고, 아버지 시대의 낡은 유산을 청산하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진 전략적 대응이었다.
'뉴롯데'의 핵심은 신격호 시대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각 개혁 과제는 창업주가 남긴 유산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한 시도였다.
지배구조 개혁: 가장 시급한 과제는 미로처럼 얽힌 지배구조를 단순화하고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신동빈 회장은 2017년 롯데제과 등 4개 상장 계열사의 투자부문을 합병하여 '롯데지주 주식회사'를 출범시켰다. 이를 통해 400개가 넘던 순환출자 고리를 대부분 해소하고, 한국 계열사들을 수직적으로 지배하는 현대적인 지주회사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는 '황제 경영'의 근간이었던 불투명한 소유 구조를 해체하려는 시도였다.
투명성 강화: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드러난 폐쇄적인 경영 문화를 탈피하고, 주주 중심의 투명 경영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과거의 양적 성장에서 벗어나 질적 성장으로 경영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비밀주의 속에서 위기가 곪아 터졌던 과거에 대한 명백한 반성이었다.
전략적 방향 전환: 기존의 식품, 유통 등 내수 중심의 성숙 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미래 성장을 이끌 새로운 동력을 발굴하는 데 그룹의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는 변화에 둔감하고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롯데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의지였다.
결론적으로 '뉴롯데'는 '탈(脫)신격호' 프로젝트였다. 신동빈 회장의 개혁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이 가진 구조적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해결하려는 과정 그 자체였다. 이는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 태어난 생존과 재도약을 위한 필사적인 전략이었다.
제13장 새로운 영토를 향한 항해: 바이오, 배터리 그리고 그 너머
'뉴롯데' 비전 아래, 신동빈 회장은 그룹의 미래를 담보할 신사업 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이는 롯데그룹의 전통적인 사업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화학 및 첨단소재: 롯데케미칼은 그룹의 새로운 성장축으로 부상했다. 삼성SDI의 화학부문, 삼성정밀화학 등 삼성그룹의 화학 계열사를 인수하며 덩치를 키웠고 , 가장 상징적인 투자는 2023년 2조 7천억 원을 투입해 동박 제조업체인 일진머티리얼즈를 인수한 것이다. 사명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로 바꾼 이 회사를 통해 롯데는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동박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며, 고성장하는 미래 산업에 발을 들였다.
바이오테크놀로지: 롯데는 바이오 산업을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 낙점했다. 2022년 '롯데바이오로직스'를 설립하고, '2030년까지 글로벌 톱10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으로 도약'이라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인천 송도에 수조 원 규모의 메가 플랜트 건설을 추진하고, 미국 시러큐스 공장을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사업 구조조정: 동시에 비핵심 사업이나 부진한 사업에 대한 과감한 정리도 병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야심 차게 출범했던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 '롯데헬스케어'는 시장 환경 변화와 사업성 부진을 이유로 3년 만에 청산을 결정했다. 이는 과거와 달리 '선택과 집중'을 통해 그룹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려는 새로운 전략적 기조를 보여준다.
표 3: 신동빈 체제 하의 주요 M&A 및 신사업
| 사업/기업명 | 시기 | 투자 규모/내용 | 전략적 목표 |
| 삼성그룹 화학부문 | 2015년 | 약 3조 원 | 석유화학 사업 포트폴리오 강화 및 규모의 경제 확보 |
|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구 일진머티리얼즈) | 2023년 | 2조 7천억 원 |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동박) 시장 진출, 신성장 동력 확보 |
| 롯데바이오로직스 | 2022년 | 3조 7천억 원 투자 계획 |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사업 진출, 글로벌 톱10 목표 |
| 롯데헬스케어 | 2022년-2025년 | 700억 원 출자 후 청산 |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 사업 시도 후, 사업성 재검토에 따른 신속한 철수 |
제14장 결론: 영속하는 유산과 미완의 과제
신격호의 99년 생애와 그가 세운 롯데 제국의 역사는 빛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교차하는 한 편의 대서사시다. 그는 맨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차별과 역경을 딛고 양국에 걸쳐 거대한 부를 이룬 입지전적인 기업가였다. '기업보국'의 신념으로 모국의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며, 롯데월드타워라는 기념비적인 유산을 남긴 비전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제국을 사유물처럼 여기며 절대 권력을 휘두른 '황제'였고, 그의 폐쇄적이고 전근대적인 통치 방식은 결국 그룹 전체를 뒤흔드는 파괴적인 경영권 분쟁과 비리 사건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이제 롯데는 창업주의 시대를 지나 아들 신동빈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는 '뉴롯데'라는 기치 아래 지주회사 체제 전환, 순환출자 해소 등 지배구조를 현대화하고, 바이오와 배터리 소재 등 미래 산업에 과감히 투자하며 그룹의 체질을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뉴롯데' 프로젝트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그룹의 주력인 화학 부문은 글로벌 경기 침체로 고전하고 있으며 , 유통 부문은 온라인으로의 전환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이고 시급한 과제는 수년간 지연되고 있는 '호텔롯데'의 기업공개(IPO)다. 호텔롯데를 성공적으로 상장시켜 일본 롯데홀딩스의 지분율을 희석시키는 것만이, 롯데그룹의 지배구조를 온전히 한국에 뿌리내리게 하고 '일본 기업'이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는 창업주가 남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푸는 마지막 단계이자, '뉴롯데' 개혁의 화룡점정이다.
결국 롯데의 역사는 그 시작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이중성'과의 싸움이다. 창업주 신격호는 그 이중성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았고, 그의 아들들은 그 이중성 때문에 벌어진 비극적 다툼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이제 '뉴롯데'의 최종 과제인 호텔롯데 IPO는, 창업주가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시작된 이 근원적인 이중성을 해소하고 롯데의 정체성과 지배구조를 온전히 한국에 정착시키기 위한 마지막 관문으로 남아있다. 창업주의 그림자는 그가 세운 제국 위에 여전히 길게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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